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징 전투 (문단 편집) ==== 난징의 함락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ongshan_Gate.png|width=100%]] || || 중산문을 점령한 일본군 || ||[youtube(GRELr_GF83w)]|| ||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 탕성즈의 명령에 따라 사령장관부 직속 부대와 36사단 헌병대가 오후 6시부터 기선을 타고 철수하기 시작했고 오후 3시부터 사령장관부와 연락이 두절된 일선부대는 크게 동요하여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통신선이 끊어진 관계로 후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에도 탕성즈는 군사 기밀서류를 소각하고 관저에 불을 지른 다음에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령장관부를 들르려 했으나 교통혼란으로 인해 차를 이용할 수 없어 그만두고 오후 8시에 해군함정 전용 부두에 도착, 방위군 간부 전원을 모은 다음에 9시에 마지막 기선을 타고 육합현으로 탈출했다. 허나 난징시장 대리이자 헌병대 부사령관 샤오산링 소장은 퇴각을 거부하고 권총으로 자결했고 159사단 부사단장 뤄처췬 소장도 부하들과 함께 일본군을 향해 돌격하다 전사했다. 그외의 여러 중국군 고급 지휘관들이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하거나 자결함으로 난징과 생사를 같이 하였다. 하지만 탕성즈가 달아났단 소식과 일본군 대군이 성안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에 중국군은 완전히 무너져내려 각자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탈출을 위해 같은 국민당 군 끼리 총격전을 벌이는 등[* 성문들과 포구에는 탕성즈의 명령으로 배치된 독전대가 있었고 후퇴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무단후퇴금지령은 유효한 상태였다.] 와해되었다. 시민들 역시 패닉에 휩싸여 남주의 주택밀집가에서부터 대규모 탈출행렬이 퇴각하는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시카고 신문의 기자 스틸은 당시의 혼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병사들이 퇴각하는 주요 간선도로인 중산로에서 불과 몇 야드 밖에 떨어지지 않은 교통부의 100만 달러짜리 청사에 방화했을 때, 지옥을 방불케했다. 그곳은 탄약고로 사용되고 있어 불이 포탄, 폭탄창고에 이르렀을 때 무서운 폭음이 밤 하늘을 관통했다. 총탄과 포탄의 파편이 높게 모든 방향으로 새된 소리를 내며 흩어져 강가에 이르는 도로를 배회하는 군중의 공포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타오르는 청사는 드높게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무섭게 열을 뿜어냈다. 공포에 빠진 군중의 행렬이 주저하며 걸음을 멈추었고, 교통은 정체되었다. 트럭, 대포, 오토바이 등과 말이 끄는 수레가 맞부딪히며 뒤엉키는 한편, 뒤에서는 계속 앞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행로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길바닥의 집적물에 불이 옮겨붙어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불꽃의 장벽을 만들었다. 퇴각하는 군대에 남아 있던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제 각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불타는 장해물을 우회해서 간신히 하관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잔해나 시체로 막혀 있는 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는 이 거대한 성벽을 넘으려는 야만적인 돌격이었다. 옷을 벗어 묶어서 줄을 만들었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은 흉벽에서 소총과 기관총을 내던져 버리고 기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진퇴유곡에 빠진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1938년 1월 3일자 시카고 데일리 뉴스|| 9시, 육군장갑병단 병력이 사령장관부와 연락이 더 이상 닿지 않자 무단 퇴각을 감행하여 자신들을 막는 36사단 기관총 부대를 전차로 짓밟고 탈출했다. 이렇게 퇴로가 뚫리자 시민과 병사들의 물결이 성밖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강을 건널 방법이 전무했으므로 10시 쯤에 몇킬로에 걸친 강변에 엄청난 숫자의 패잔병과 난민들만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을 구를 뿐이었다. 1만명 정도의 병력이 장강 남안을 건너려다가 6사단 기병연대의 공격에 1천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쫓겨났다. 성벽 서쪽 습지대로 탈출하려던 중국군도 6사단 45연대에 저지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너도나도 장강에 몸을 던져 헤엄치거나 급조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익사하거나 탈진해서 사망했다.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던 사람들은 총을 버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어 숨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할 것이라 믿어졌던 난징 안전구 [* [[욘 라베]]가 다른 외국인들과 난징대학을 중심으로 만든 안전구역이다.]로 몰려들었다. ||일요일(12일) 밤, 중국 병사는 안전구 내로 흩어져 많은 군인이 군복을 벗어버렸다. 민간인의 옷을 훔치거나 지나가던 시민들의 옷을 구하기도 했다. 또 "평상복"을 찾지 못한 군인들은 군복을 벗어버리고 속옷만 입고 있었다. 군복과 함께 무기도 버렸기 때문에 길가에는 소총, 수류탄, 검, 배낭, 상의, 군화, 군모 등으로 가득했다. 하관문 근처에서 버려진 군장품은 엄청난 양이었다. 교통부 앞에서 두 블록 앞까지 트럭, 대포, 버스, 사령관의 자동차, 짐마차, 기관총, 휴대무기 등이 쌓여 쓰레기장처럼 되어 있었다.|| ||1938년 1월 9일자 뉴욕타임스|| 13일 0시 30분부터는 더 이상 저항하는 병사들이 없었다. 최후의 방어진지인 중산문을 일본군 18사단 20연대가 점령, "쇼와 12년 12월 13일 오전 3시 10분, 오노 부대 점령"이라고 분필로 써놓았다. 12월 13일 일본군은 총공세를 취했고 오전 4시에 난징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이제부터 소위 잔적 소탕을 명령, 담당구역을 할당하고 성내로 몰려들었다. 10군 사령관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은 다음과 같은 명령서를 보냈다. ||정집단명령(정집작명갑호의) 12년 13일 오전 8시 30분. 하나, [정] 집단은 남경성내의 적을 소탕하라. 하나, 각 병단은 성내를 향해 포격은 물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적을 소탕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성안을 소각하고, 특히 패적의 기만행위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 9사단 8여단장 아키야마 요시미쓰 소장도 <남경성내 소탕명령>, <소탕실시에 관한 주의>를 내보냈다. ||하나, 도주한 적은 대부분 평상복으로 가장했을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의심이 가는 자는 모두 검거하고 적절한 장소에 감금한다. 하나, 청장년은 모두 패잔병 또는 편의병으로 보고, 모두 체포감금해야 한다.|| 입성한 일본군은 마치 토끼사냥을 하듯이 안전구와 시내를 샅샅이 뒤지며 중국군과 중국군 부역자들을 색출하고 패잔병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대학살을 벌이게 된다. 대략 중국군 15만명 정도가 난징 방위전에서 싸웠고 가사하라 도쿠시는 이 중에서 4만명이 난징을 탈출하여[* 역으로 일본군이 난징으로 쳐들어 온 동쪽방면으로 도망갔다. 일본군도 상하이에서 급하게 난징으로 몰려온거라 지휘체계와 점령 정책이 원활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후에 집결하여 다시 일본군과 싸웠고 2만명이 전사 혹은 부상, 1만명이 행방불명, 나머지 8만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하거나 학살되었다고 추정했다. 이후 우한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는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1939년 5월에 복권되었으나 그는 다시 실권을 쥐지 못했고 국공내전 중에 공산당에 전향해서 후난성 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나 문화대혁명 중에 숙청되어 전 국가주석 [[류사오치]]처럼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하여 온갖 질병은 다 얻은 채 82세에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12월 17일 입성한 마쓰이 장군은 난징 함락을 기념하는 퍼레이드를 행했으나 이후 학살을 방조한 전범으로 교수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